후안 우리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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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안 우리베는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의 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수로, 유격수와 3루수 포지션에서 주로 활약했다. 1997년 콜로라도 로키스와 계약하며 프로 경력을 시작했으며, 2001년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 이후 시카고 화이트삭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뉴욕 메츠,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등 여러 팀에서 뛰었다. 2010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소속으로 월드 시리즈 우승을 경험했으며, 뛰어난 수비와 펀치력을 겸비한 선수로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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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안 우리베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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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후안 세스페데스 우리베 테나 |
| 출생일 | 1979년 3월 22일 |
| 출생지 | 팔렌케, 도미니카 공화국 |
| 신장 | 180cm |
| 체중 | 106kg |
| 포지션 | 내야수 |
| 타석 | 우타 |
| 투구 | 우투 |
| 프로 입단 | 1997년 아마추어 자유 계약 (콜로라도 로키스) |
| 첫 출장 (MLB) | 2001년 4월 8일 |
| 마지막 출장 (MLB) | 2016년 7월 30일 |
| 연봉 | 4,000,000 달러 (2016년) |
| 선수 경력 | |
| MLB | 콜로라도 로키스 (2001–2003) 시카고 화이트삭스 (2004–2008)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2009–2010)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2011–2015)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2015) 뉴욕 메츠 (2015)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2016) |
| 수상 경력 | |
| 수상 | 2× 월드 시리즈 우승 (2005, 2010) |
| 통계 (MLB) | |
| 타율 | .255 |
| 홈런 | 199 |
| 타점 | 816 |
2. 어린 시절
도미니카 공화국 페라비아주의 도시인 바니에서 태어났다.[86][22] 그는 성장하면서 야구에 흥미를 갖게 되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호세 우리베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86][1] 호세는 후안 우리베의 둘째 사촌형이었지만, 나이 차이가 있어 후안은 그를 "삼촌"이라고 불렀다.[86][1]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 비시즌 기간에 호세는 고향으로 돌아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유격수로 뛰었던 자신의 경험을 후안에게 이야기해주곤 했다.[86][1] 후안 역시 뛰어난 야구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1997년, 콜로라도 로키스의 스카우트 조지 포사다 시니어는 원래 투수 에네멘시오 파체코를 스카우트하러 갔다가 우리베를 발견하게 되었다.[87][104][88] 스카우트는 5000USD의 계약금을 제안했지만, 우리베와 그의 아버지는 이 금액이 너무 적다고 생각하여 더 높은 금액을 요구했다. 그러나 결국 처음 제안된 금액으로 계약을 체결했다.[87][104][88]
후안 우리베는 1997년 콜로라도 로키스와 계약하며 프로 야구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마이너 리그를 거쳐 2001년 메이저 리그에 데뷔한 그는 이후 시카고 화이트삭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뉴욕 메츠,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등 여러 팀에서 활약했다. 주로 유격수로 뛰었지만, 2루수, 3루수 등 내야 여러 포지션을 소화하는 유틸리티 플레이어로서의 능력도 보여주었다. 특히 시카고 화이트삭스(2005년)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2010년) 소속으로 두 차례 월드 시리즈 우승에 기여하는 등 인상적인 경력을 쌓았다.
3. 프로 야구 경력
3. 1. 마이너 리그 경력
우리베는 에이전트 밥 미슐랭을 통해 계약금을 높이려 했으나, 결국 스카우터 펠릭스 포사다가 제안한 5000USD에 콜로라도 로키스와 계약했다.[2][22][3]
프로 선수 경력은 도미니칸 서머 리그(DSL)의 DSL 로키스에서 시작했다.[89] 1998년과 1999년에는 애리조나 루키 리그와 사우스 애틀란틱 리그의 싱글 A 팀 애슈빌 투어리스츠에서 뛰었다. 애슈빌에서는 125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67, 28개의 2루타, 9개의 홈런, 46타점을 기록했으며, 시즌 중 15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하기도 했다.[22] 2000년에는 캐롤라이나 리그의 싱글 A 어드밴스드 팀인 세일럼 애벌란치 소속으로 134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56, 13홈런, 65타점을 기록했다.[22] 시즌 종료 후, 야구 전문 잡지 ''베이스볼 아메리카''는 그를 로키스 구단 내 전체 2위 유망주로 평가했다.[4]
3. 2. 콜로라도 로키스 (2001–2003)
후안 우리베는 1997년 콜로라도 로키스와 계약하며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세 시즌 동안 로키스 소속으로 활동했으며, 2001년 4월 8일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의 경기에서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91] 이 기간 동안 주로 유격수로 활약했다.
3. 2. 1. 2001년: 루키 시즌
2001년은 우리베의 루키 시즌으로, 콜로라도 로키스 소속으로 72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300, 8홈런, 53타점을 기록했다.[22] 특히 11개의 3루타를 기록하며 네이피 페레즈와 후안 피에르가 세웠던 팀 기록과 타이를 이루었다.[91][22]
우리베는 2001년 4월 8일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의 경기에서 대타로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으나, 제이 위타식을 상대로 삼진을 당했다. 팀은 이 경기에서 11-3으로 패했다.[91][5] 3일 뒤인 4월 11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경기에서는 맷 모리스를 상대로 메이저 리그 데뷔 첫 안타를 기록했지만, 팀은 3-1로 패했다.[92][6]
시즌 초반에는 메이저 리그와 퍼시픽 코스트 리그의 트리플 A 팀인 콜로라도스프링스 스카이삭스를 여러 차례 오갔다.[89][7] 하지만 7월 25일, 팀이 주전 유격수였던 페레즈를 트레이드하면서 우리베는 주전 유격수 자리를 맡아 선발 라인업에 꾸준히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다.[89][7] 8월 2일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경기에서는 데이브 코긴을 상대로 메이저 리그 첫 홈런을 쳤으나, 팀은 4-2로 패했다.[93][8] 10월 7일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의 경기에서는 한 이닝에 2개의 안타, 2개의 장타, 6루타를 기록하는 등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이는 이전에 다른 메이저 리그 세 팀이 세웠던 기록과 같은 것이었다.[104][9]
3. 2. 2. 2002년
2002년은 로키스에서 보낸 첫 메이저 리그 풀타임 시즌이었다.[95][22] 이 해에 150경기에 유격수로 선발 출장하여 타율 .240, 6홈런, 49타점, 25개의 2루타를 기록했다.[95][22] 시즌 초반인 4월과 5월 사이에는 개인 통산 최다인 17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하기도 했다.[95][10] 그러나 5월부터 8월까지는 타격 슬럼프에 빠졌고, 수비에서도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며 팀 내 가장 많은 27개의 실책을 기록했다.[95][13] 시즌 후반에는 타격감이 다소 회복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9월 17일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과의 경기에서는 개인 한 경기 최다 안타 기록과 같은 4안타를 기록했는데, 사이클링 히트 달성에는 홈런 하나가 부족했다.[104][11]
3. 2. 3. 2003년
스프링 트레이닝 기간이던 3월 1일, 경기 중 베이스를 돌다가 부상을 당해 6월 3일까지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12][94] 부상에서 복귀한 첫 경기에서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리카르도 로드리게스를 상대로 홈런 2개를 기록했다.[12][94] 이 시즌부터 외야수로도 경기에 나서기 시작했으며, 6월 15일에는 중견수로 선발 출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팀 동료였던 호세 에르난데스가 트레이드된 이후에는 다시 주 포지션인 유격수로 돌아왔다.[13][95] 2003 시즌에는 총 87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53, 80안타, 19개의 2루타, 10개의 홈런, 33타점을 기록했다.[22][104] 시즌 종료 후인 12월 2일, 아론 마일스를 상대로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트레이드되었다.[13][95]
3. 3. 시카고 화이트삭스 (2004–2008)

2003년 12월 2일, 애런 마일스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이적했다. 이적 첫 해인 2004년에는 23개의 홈런을 기록하고 뛰어난 수비력을 선보이며 팀의 주전 선수로 자리 잡았다.
2006년 시즌 종료 후 고향인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돌아갔을 때 총기 발사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기도 했으나, 우리베 본인이 직접 총을 쏘았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2008년 시즌에는 뛰어난 수비력을 갖춘 유격수 올랜도 카브레라가 팀에 합류하면서, 우리베는 기존의 유격수 자리 대신 이구치 타다히토의 이적으로 공석이 된 2루수로 전환되었다. 하지만 시즌 초반 부진과 부상, 그리고 신인 알렉세이 라미레스의 활약이 겹치면서 주전 자리를 잃고 내야 유틸리티 플레이어 역할을 맡게 되었다. 시즌 후반기에는 부상당한 조 크리디를 대신해 3루수로 출전하는 등 1루를 제외한 내야 전 포지션을 소화하며 팀에 기여했다. 시즌 종료 후인 10월 30일 FA 자격을 얻었다.
3. 3. 1. 2004년
2003년 12월 2일, 2루수 애런 마일스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이적했다.[13] 화이트삭스 입단 초기에는 주전 자리를 확보하지 못했지만, 2004년 시즌에는 2루수, 유격수, 3루수를 오가며 총 134경기에 출전했다.[96][14] 6월 19일 몬트리올 엑스포스와의 경기에서는 팀이 17-14로 패배했으나, 우리베는 혼자 7타점을 올리는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이는 당시 화이트삭스 한 경기 개인 최다 타점 기록에 단 1점이 부족한 기록이었다.[97][15]
이 해에 우리베는 만루 시 타율(.556), 득점권 타율(.340), 타율(.283), 홈런(23개), 타점(74개), 안타(142개), 득점(82개) 등 여러 타격 부문에서 개인 최고 기록(커리어 하이)을 달성했다.[96][22] 특히 홈 경기에서 타율 .315와 6홈런을 치며, 원정 경기에서의 타율 .248과 7홈런보다 더 좋은 성적을 보였다.[104][22] 시즌 종료 후인 12월 16일, 우리베는 화이트삭스와 2007년까지 3년간 975만달러 규모의 계약 연장에 합의했다. 이 계약에는 2008년 구단 옵션 조항도 포함되었다.[98][16]
3. 3. 2. 2005년: 월드 시리즈
2005년 호세 발렌틴이 팀을 떠나면서 우리베는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주전 유격수로 시즌 전체를 뛰었다.[104][99][22][17] 그는 잔부상에도 불구하고 146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52, 121안타, 23개의 2루타, 16개의 홈런, 74타점을 기록했다.[104][22] 아메리칸 리그 디비전 시리즈(ALDS) 1차전에서는 보스턴 레드삭스를 상대로 홈런을 포함해 3타점을 올리며 팀의 14-2 대승에 기여했다.[100][18] 2005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마지막 아웃 카운트 두 개를 처리하는 결정적인 수비를 펼쳤다. 먼저 파울 타구를 쫓아가 3루 관중석으로 넘어지면서 잡아냈고, 이어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오를란도 팔메이로가 친 3루 방면 느린 땅볼 타구를 불안정한 자세에서도 러닝 스로로 처리하여 아웃시켰다. 이러한 활약으로 화이트삭스는 88년 만에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89][101][19]
3. 3. 3. 2006년
7월 2일 시카고 컵스와의 경기에서 5타점을 기록했지만, 팀은 5-11로 패배했다.[102][20] 이틀 뒤인 7월 4일에는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상대로 다시 5타점을 올리며 팀의 13-0 대승에 기여했다.[103][21]
2006년 시즌에는 132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35, 21홈런, 71타점을 기록하며 좋은 파워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출루율은 개인 통산 최저인 .257에 그쳤다.[104][22] 낮은 출루율과 부상 문제로 인해 10경기에 결장했고, 때때로 주전 유격수 자리를 알렉스 신트론에게 내주기도 했다.[105][23]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 내 희생타 1위를 기록했으며, 수비에서는 .977의 수비율로 아메리칸 리그 4위에 오르는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다.[104][24] 또한, 2004년부터 2006년까지 3년 연속으로 70타점 이상을 기록한 메이저 리그 유격수 중 한 명으로, 데릭 지터, 미겔 테하다, 에드가 렌테리아, 마이클 영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104][22]
3. 3. 4. 2007년
2007년 9월 29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 페르난도 로드니를 상대로 끝내기 1타점 1루타를 쳐 팀의 3-2 승리를 이끌었다.[25][106] 시즌 동안 150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34, 120안타, 18개의 2루타, 20개의 홈런, 68타점을 기록했다.[104][22] 수비에서는 리그 2위에 해당하는 .976의 수비율을 기록했지만, 득점권 상황에서는 .198의 타율로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104][22] 시즌 종료 후 시카고 화이트삭스는 2008년 우리베에 대한 옵션 행사를 포기했지만, 11월 7일 1년 450만달러의 조건으로 재계약했다.[107][26]
3. 3. 5. 2008년
2008년 시즌에 들어서며 시카고 화이트삭스는 오를란도 카브레라를 영입했고, 우리베는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알렉세이 라미레즈, 대니 리차, 파블로 오즈나와 함께 주전 경쟁을 벌였다.[108][27] 그 결과 2루수 주전을 차지했지만, 5월에 당한 부상으로 인해 라미레즈에게 선발 자리를 내주었다.[109][110][111][28][29][30] 그러나 8월 1일, 조 크리디의 부상으로 일주일 동안 임시로 3루를 맡았던 조시 필즈를 대신하여 우리베가 3루수 자리를 맡게 되었다.[110][112][113][29][31][32]
이 해 시즌 110경기에 출전하여 324타수 80안타, 22개의 2루타, 7개의 홈런, 40타점을 기록했다.[104][22] 시즌 종료 후 10월 30일, 자유 계약 선수 자격을 신청했다.[114][33]
화이트삭스에서 활동하는 동안 우리베는 재능 있는 선수로 평가받았다. 특히 넓은 수비 범위와 강한 어깨를 바탕으로 한 능숙한 수비, 그리고 홈런을 칠 수 있는 펀치력이 강점으로 꼽혔다. 본래 포지션은 유격수였으나 3루수, 2루수 등 내야 여러 포지션을 소화하는 유틸리티 능력도 보여주었다. 그러나 아지 기옌 감독으로부터 낮은 출루율과 기복 있는 컨디션에 대한 지적을 받는 등[108][27] 분명한 단점도 가지고 있었다.
3. 4.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2009–2010)
2008 시즌 후 FA가 된 우리베는 2009년 1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마이너 리그 계약을 맺었으나, 시즌 개막 로스터에 포함되며 메이저 리그 경력을 이어갔다.[115][116] 자이언츠에서의 첫 시즌에는 주로 내야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활약하며 타율 .289를 기록하는 등 준수한 모습을 보였다.[117][104] 2010년에는 팀의 주전 유격수로 자리 잡았고, 개인 통산 최다인 24홈런과 85타점을 기록하며 공격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쳤다.[121][104] 특히 포스트시즌에서는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와 월드 시리즈에서 결정적인 활약을 펼치며 팀의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125][126][127][129]
3. 4. 1. 2009년
2009년 1월 29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마이너 리그 계약을 체결했다.[115] 하지만 4월 4일 발표된 자이언츠의 최종 개막 로스터에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포함되었고,[116] 시즌 동안 2루수, 유격수, 3루수로 자주 선발 출전했다.[117]
7월 10일, 샌디에이고와의 경기에서 자이언츠 선발 투수 조너선 산체스가 퍼펙트 게임을 향해 순항 중이었다. 그러나 8회 1사 상황에서 우리베가 땅볼 수비 실책을 저질러 체이스 헤들리를 1루로 내보냈다.[89] 이 실책으로 인해 산체스는 2004년 랜디 존슨 이후 첫 퍼펙트 게임 달성 기회를 아쉽게 놓치고 말았다. 산체스는 이후 남은 타자들을 모두 범타 처리하며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는데, 이는 1990년 테리 멀홀랜드 이후 처음으로 안타와 볼넷을 내주지 않고도 퍼펙트 게임을 기록하지 못한 경기였다.[118]
이 시즌 우리베는 122경기에 출전하여 398타수에서 타율 .289(커리어 하이), 115안타, 26개의 2루타, 16개의 홈런, 55타점을 기록했다.[104]
3. 4. 2. 2010년: 월드 시리즈
2010년 1월 4일, 우리베는 자이언츠와 1년 325만달러의 계약을 다시 맺었다.[119][38] 그는 프레디 산체스의 부상으로 인해 2010 시즌을 자이언츠의 주전 2루수로 시작했다.[120][39] 5월 초에는 부상당한 에드가 렌테리아를 대신하여 유격수로 포지션을 옮겼고, 시즌이 끝날 때까지 주전 유격수로 활약했다.[121][122][40][41] 9월 5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를 상대로 한 경기에서 팀이 4-3으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조나단 브록스턴을 상대로 역전 결승 투런 홈런을 쳐 팀의 5-4 승리를 이끌었다.[123][42] 9월 23일, 컵스와의 경기에서는 2회에만 라이언 뎀스터를 상대로 투런 홈런과 만루 홈런을 기록하며 총 6타점을 올려 팀의 13-0 대승에 기여했다.[124][43]
그는 시즌을 타율 .256, 개인 통산 최다인 24홈런과 85타점으로 마감했다. 521타수에서 129안타를 기록하며 통산 1000안타를 넘어섰고, 24개의 2루타와 2개의 3루타를 기록했다.[104][22]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맞붙은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는 중요한 활약을 펼쳤다. 10월 20일 4차전에서 로이 오스왈트를 상대로 끝내기 희생 플라이를 쳐 팀에 6-5 승리를 안겼고,[125][44] 10월 23일 열린 6차전에서는 8회 초 라이언 매드슨을 상대로 결승 솔로 홈런을 쳐내며 팀의 3-2 승리와 월드 시리즈 진출을 확정지었다.[126][45] 텍사스 레인저스와 맞붙은 월드 시리즈에서도 활약은 이어졌다. 10월 27일 1차전에서 다렌 오데이를 상대로 3점 홈런을 터뜨려 팀의 11-7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127][46] 2차전에서는 7회 C. J. 윌슨을 상대로 2-0 리드를 만드는 타점을 올렸고, 8회에도 타점을 추가하며 팀의 9-0 대승에 힘을 보탰다.[128][47] 자이언츠는 5경기 만에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고, 우리베는 개인 통산 두 번째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를 얻었다.[129][48]
3. 5.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2011–2015)
(내용 없음)
3. 5. 1. 2011년
2010년 시즌 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 3년 2100만달러 계약을 맺었다.[49][130] 다저스에서의 첫 시즌인 2011년은 우리베에게 있어서 최악의 시즌 중 하나였다. 두 번이나 부상자 명단에 올랐으며, 2001년 이후 가장 적은 77경기 출전에 그쳤다.[22][104] 시즌 타율 .204, 4홈런, 28타점만을 기록하며 경력상 가장 저조한 성적을 보였다.[22][104] 7월 30일에는 복통으로 인해 15일 부상자 명단에 올랐다.[50][131] 처음에는 15일 후에 복귀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부상이 호전되지 않았고 결국 스포츠 탈장으로 진단받아 시즌을 마감하는 수술을 받아야 했다.[51][132]
3. 5. 2. 2012년

2012년 시즌에 들어서 우리베의 건강 상태는 전에 비해 나아졌지만 성적은 전년과 비교해 변한 것이 없었다. 5월 14일부터 6월 10일까지 왼쪽 손목 부상으로 부상자 명단에 올랐다.[133][52] 6월 이후에는 주전 자리를 잃고 시즌 후반기에는 주로 대타로 기용되었다.[134][53] 이 해 그는 단 66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191이라는 자신의 통산 최저 기록을 세웠고, 2홈런과 17타점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104][22]
3. 5. 3. 2013년
2013년 시즌을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시작했으나, 자주 3루수로 선발 출전하며 6월에는 주전 자리를 확보했다.[135][136][54][55] 7월 5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는 7타점을 기록했고, 단타 하나만 더 쳤다면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할 뻔했다. 팀은 이 경기에서 10-2로 크게 이겼다.[137][56] 9월 9일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를 상대로는 4타수 4안타를 기록했는데, 첫 세 타석에서 연속 홈런을 쳐내며 개인 통산 첫 한 경기 3홈런을 기록했다.[57]
2013년 시즌 다저스 소속으로 총 132경기에 출전했는데, 이는 다저스에서의 첫 두 시즌 출장 경기 수(143경기)와 거의 비슷한 수치였다. 시즌 타율 .278, 12홈런, 50타점을 기록했다.[104][22] 시즌 중 가장 극적인 순간은 10월 7일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의 내셔널 리그 디비전 시리즈(NLDS) 4차전이었다. 8회 말, 팀이 2-3으로 뒤진 상황에서 극적인 역전 2점 홈런을 터뜨려 4-3 리드를 안겼다. 이 홈런은 결승 홈런이 되었고, 다저스는 브레이브스를 시리즈 전적 3승 1패로 꺾고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 진출했다.[58]
시즌 종료 후인 12월 14일, 우리베는 다저스와 2년 1500만달러 규모의 계약 연장에 합의했다.[59]
3. 5. 4. 2014년
2014년 시즌에도 좋은 활약을 이어가 103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311, 9홈런, 54타점을 기록했다.[141][22] 그는 경기장 안팎에서 팀 분위기를 이끄는 핵심 선수로 평가받았으며, 동료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141][60] 당시 다저스 감독이었던 돈 매팅리는 정규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우리베에게 일일 감독을 맡겼고, 팀은 이 경기에서 10-5로 승리했다.[141][60]
3. 5. 5. 2015년
2015년 시즌이 시작되었으나 시즌 초반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주전 경쟁에서도 저스틴 터너와 알렉스 게레로에게 밀렸다.[142][61] 시즌 첫 29경기에서 타율 .247, 1홈런 6타점을 기록했다.[143][22]
3. 6.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2015)
2015년 5월 27일, LA 다저스는 후안 우리베와 크리스 위스로를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로 보내고, 알베르토 카야스포, 에릭 스털츠, 이안 토마스, 후안 하이메를 받는 2대4 트레이드를 단행했다.[144] 이 트레이드는 마침 다저 스타디움에서 열리고 있던 다저스와 애틀랜타의 3연전 중에 이루어졌다. 우리베는 시리즈 마지막 경기에서 바로 애틀랜타 유니폼을 입고 출전하여 3타수 무안타를 기록했지만, 팀은 승리했다.[145] 트레이드 소감을 묻는 질문에 우리베는 "트레이드 때문에 마음이 상하거나 하진 않았어요. 만일 다저스가 나를 축구팀이나 농구팀으로 트레이드시켰다면야 속상했겠지요."라고 답했다.[146] 다저스 시절 그의 인기는 여전해서, 트레이드 이후에도 예정되어 있던 우리베의 버블헤드 나이트 행사가 그대로 진행되었다.[147]
3. 7. 뉴욕 메츠 (2015)

2015년 7월 24일,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는 존 갠트와 롭 왈렌을 받는 조건으로 우리베와 켈리 존슨을 뉴욕 메츠로 트레이드했다.[148][66] 메츠 이적 후 두 번째 경기에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를 상대로 10회 말 끝내기 안타를 쳐 팀의 3-2 승리에 기여했다.[149][150][67][68] 9월에 가슴 타박상을 입어 2015년 내셔널 리그 디비전 시리즈와 2015년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는 출전하지 못했다.[151][69] 그러나 2015년 월드 시리즈 로스터에는 포함되었고, 3차전 6회에 대타로 나와 1타점 적시타를 기록했다.[152][70] 소속팀 뉴욕 메츠는 캔자스시티 로열스와의 월드 시리즈에서 5차전까지 가는 승부 끝에 패배했다.[153][71]
3. 8.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2016)

2016년 시즌 스프링 트레이닝 시작 직전에 우리베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구단과 1년 400만달러의 계약을 맺었다.[154] 2016년 6월 12일, 애너하임에서의 경기에서 우리베는 마이크 트라우트의 106mph에 달하는 땅볼 타구에 고환을 맞고 경기장 밖으로 실려 나갔고,[155] 이후 고환 타박상 진단을 받았다.[156] 같은 해 8월 1일 소속팀은 우리베를 지명할당했으며, 8월 5일에는 그를 방출했다.[157]
4. 개인적인 삶
도미니카 공화국 바니에서 태어났으며, 아나와 결혼하여 후안 루이스, 후아니, 하니, 호아니 네 자녀를 두었다.[104][22] 형 엘피디오가 있다.[159][77] 우리베는 영어를 구사하지만 유창하지 않아 선수 생활 동안 인터뷰 시 통역의 도움을 자주 받았다.[88][108][3][27]
매년 야구 비시즌 기간인 겨울에는 고향인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돌아가 윈터 리그에 참가한다.[104][22] 여러 자선 단체를 위해 활동했으며, 2004년에는 골든 애플 재단 버스에서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미국 군인 자녀들을 위한 그림 그리기 대회를 돕기도 했다.[104][22]
4. 1. 총격 혐의
2006년 10월, 우리베는 고향인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총격을 가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안토니오 곤잘레스 페레즈라는 이름의 농부가 우리베가 쏜 비비탄 총(일부 보도에서는 공기총[158])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며 그를 고소했다.[76] 산 크리스토발 주 지방 검찰청은 우리베가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다고 주장했지만,[158][76] 도미니카 당국(판사)은 사건 조사를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변호인 측의 출국 금지 요청은 기각되었으나, 2007년 1월 5일 법원은 사건이 종결될 때까지 우리베에게 매달 15일과 30일에 법원에 출두하라고 명령했다.[158][76]우리베는 계속해서 사건과의 관련성을 부인했으며, 법정 절차가 마무리될 때까지 야구를 하지 못하게 될 것을 우려했다. 그는 법정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자신했고, 당시 소속팀 시카고 화이트삭스 역시 그가 스프링 트레이닝에 정상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158][76]
2007년 2월, 우리베는 총격 사건과 관련된 모든 혐의를 벗었으며, 법원은 더 이상 그가 정기적으로 법정에 출두할 필요가 없다고 판결했다. 우리베는 이 사건을 두고 고소인 페레즈가 자신에게서 돈을 뜯어내려 한 시도였다며 '블랙메일'(blackmail) 또는 "협박"이라고 주장했다.[159][77]
5. 연도별 성적
도
속
기
석
수
점
타
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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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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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생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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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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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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